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문단 편집) === 전후 생활 === [[파일:노년만슈타인.jpg]] 1950년대 중반의 만슈타인 패전 후 [[영국군]]에 체포되어 [[1949년]]에 금고 18년을 선고받고 베른의 전범 감옥에 수감된다. 이때 여러모로 특별 대우를 받아 꽤 편안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냉전]]의 시작과 함께 이유 불문하고 독일군을 재건해야 할 상황이 되자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의 청원으로 풀려난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로 4년 뒤[* 정확히는 1950년 1월부터 수감되었고, 1952년 후반에 치료목적으로 병원에 나와 있었기에 실제 수형 기간은 2년 반 정도였다.]에 석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이 만슈타인을 넘겨받으려고 온갖 수를 다 썼다 한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소련의 각종 압력과 공작을 무시하고 영국에서 재판을 진행시켰다. 석방된 만슈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국방군]]이 [[독일 연방군]]([[서독]]군)으로 재건되면서 육군 [[중장]] 대우의 [[군무원|문관]]으로 기용되어 내각의 군사 관련 고문으로 기용, 서독 육군의 창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55년에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Verlorene Siege)》가 서독에서 처음 발매되었고 1958년 영문판이 출간되면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 회고록은 국내에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육군본부]]에서 비공식적으로 번역했다고 하며, 2016년 10월에 좋은땅 출판사에서 영문판 중역본을 새로이 출간하였다. 국내에 만슈타인이 알려진 바가 넓지 않다보니 출판한 양은 많지 않은 듯. 1958년에 회고록에서 얻은 수익으로 [[뮌헨]] 근교 이르센하우젠에 새 저택을 짓고 그곳에 정착해서 살았다. 재판 과정에서 유명세를 얻고 여러 회고록과 저서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덕택에 오히려 전후에 더욱 사회적으로 명성을 누렸다. 석방된 직후 잠시 한 지방 도시에 머물렀는데, 당시 그 마을 사람들이 환영식을 해 줄 정도였다고. 생일엔 옛 독일군 장성들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토]]군 사령관들이 함께 모여 축하 파티를 했다고 한다. 맏아들 게로는 전사했지만, 딸인 기젤라는 참모장교였던 폰 린젠탈(후에 서독군 준장으로 예편)과 결혼했고, 차남 뤼디거는 집안의 전통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고 [[지멘스]] 사에서 일했다. 동료들과 왕래하며 독서와 저술 활동으로 노후를 보내다 1973년 85세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카를 되니츠]]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룬트슈테트]]의 경우와 달리 장례식은 육군 원수의 명예에 걸맞게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수백 명의 서독연방군 군인들이 군복을 입고 참석했다. 만슈타인의 정치성향은 주변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전형적인 프로이센 귀족이라고 답변하였다. 그는 프로이센 군인의 전통처럼 정치참여 자체를 거부하였고, 충성할 대상이 있다면 그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직무를 수행하는 전형적인 프로이센 육군원수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슈타인 본인은 기사도 정신을 강조하며 잔혹행위, 이기주의, 나태 등을 금지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의 관할지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이 소련의 정치장교를 처형할 때, 유대인을 대규모 학살할 때 방조를 넘어서 탄약과 트럭을 제공했으며, 관련 서류에 서명을 하고도 끝까지 자신은 잘 몰랐다고 위증을 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비판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